광한루 역사속으로

광한루 누원(樓苑)의 수목

광한루원은 광한루를 중심으로 2,000여 평의 호수를 파고 호수 가운데 삼신산을 인공적으로 조성하고 다양한 나무들을 심어 가꾼 우리나라 전통의 원림(園林)을 이루는 지방관아에서 조성한 누원(樓苑)이다.

광한루원 경내에는 58종, 802의 수목이 심겨 있으며 개체 수 상위 5개의 수종은 소나무, 느티나무, 은행나무, 배롱나무, 산수유 순이고 대부분의 수종은 1~40주 미만이다.

광한루원의 경관 구성은 전체적으로 동쪽 남북으로 형성된 낮은 구릉의 노목 녹지대가 자연경관을 아우르며 형성되어 아늑하고 친근감을 준다. 호수를 중심으로 오래된 왕버들이 늘어서 오작교를 잇는 남북 동선(動線)은 원림으로서의 깊이를 더해주며 보는 위치와 시각에 따라 다양하게 조영된다.

또한 완월정 앞 잔디 공간은 지형을 낮게 변화시켜 걷는 방향에 따라 보여지는 시각의 변화가 흥미롭다. 완월정에서는 누원(樓苑) 전체를 조망(望)할 수 있으며 경내에 배치된 독립수 나무들도 누원의 구성 요소로서 좋은 경관을 이루고 있다.

옛 기록에 광한루와 삼신산, 호수의 모습을 신선 세계에 비유하고 있으며 선경을 구성하는 요소로 대나무, 연꽃, 백일홍 등이 사용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용성지(龍』누정 편에 보면

'상한사(漢): 감사(監司) 정철(鄭澈)이 크게 개척하고 이에 평평한 호수를 만들어 은한(銀漢: 銀河水)을 상징하였다.
둘레에 돌로 계단을 쌓았으며 가운데에 세 섬을 만들어 한 곳에는 푸른 대나무를 심고 한 곳에는 백일홍을 심었으며 한 곳에 연정(亭)을 세우고 호수 가운데 많은 연꽃을 심었다.‘

라고 기록하였다.

또 광한루 내부에는 걸려있는 유명한 시인묵객들이 남긴 편액 시에서도 광한루원 일대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홍석기(洪錫箕: 1606-1680)의 광한루시서(廣寒樓詩 書, 1673)와 금성 박황(朴潢: 1597-1648)의 등루시(登樓 詩)에는 광한루 봉래섬의 대나무 숲과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에 핀 연꽃을 선계에 비유하여 표현하였다.

황수신(身)이 쓴 <광한루기(樓記)>를 보면

'남쪽으로 큰 시내가 있어 물이 넓고 넘치는데 방장산(方丈山)에서 발원하여 은하수(銀河水)처럼 보이니 이를 요 천(川)이라 부른다.
서남쪽에는 넓은 들판이 있어 유지례 군이 밤나무 수천 뿌리를 심어 비단 부세(稅)에 대용(用)할 뿐만이 아니라 울창하게 우거진 초목이 펼쳐져 장막처럼 둘러쳐 있고 삼라만상(森羅萬象)이 한눈에 펼쳐지니 이를 율수(栗)라 부른다.’

라고 하였다.

홍석기(洪錫箕)가 쓴 광한루시서(廣寒樓詩書)에는

꽃을 재배하여 비단 같으니 연못의 연꽃 붉은 구름의 향기 머금고 섬의 떨기 진 대나무 흔들리고 섬의 대나무에 계수나무 그림자 어리네.

라고 읊었다.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제2권 실려 있는 정약용 시를 보면

층층 성벽 굽은 보루 강을 베고 누웠는데 만마관을 지나오니 광한루 여기 있네.
유수의 진영에는 정전 이미 묵히었고 백제 말에
유인궤(劉仁軌)가 이곳에 정전(田)을 개척하였다.
대방의 나라 요새 예로부터 철벽이라
남원은 대방이 아니었는데 특별히 유인궤로 인해 이름을 얻었다.
쌍계의 푸른 풀에 봄 그늘 고요하고
팔령의 만발한 꽃 전장 기운 걷혔네.
봉홧불 들 일 없고 노래와 춤 성하거니
수양버들 가지에다 배 매고 머무노라.

라고 읊었고

송강 정철은

은하를 드넓혀 밝은 달을 구경하고
대나무 가꾸어 맑은 바람 끌어 오네.
일 년 동안 남녘지방에 순찰할 때 덕화(德化)를 펴니
오직 맑은 바람과 밝은 달 속에 노닐었네.

라고 읊었으며

『용성지(龍城誌)』8권 제영(題詠)편에 관찰사(觀察使) 이현기(李)는 '가을 지났지만 연꽃 향기는 더 짙어지고 대나무 잎에 지는 빗방울 소리 점점 커지네'라고 읊었고 시권(詩權)이 쓴 시에도 '옥처럼 맑은 물가 연꽃이 시원한 비를 맞고 은하수 다리가 수양버들에 한낮 연기 걷히네'라고 읊었다.

영주각에 걸려있는 김서규(金瑞) 편액에는 '대나무숲과 수양버들이 동쪽, 서쪽을 둘러싸고 채색한 누각이 훌 쩍 날듯이 물 가운데 있네'라고 읊었으며 허현(許炫)은 '붉은 복숭아나무의 무수한 꽃가지 영주산의 비에 붉어지고 한들한들 늘어진 수양버들 가지 봉래섬 안개 속에 잠겨있네'라고 하였다.

완월정에 걸려있는 편액에도 주변의 수목이 자주 등장하는데 김정곤(金正坤)은 동산에 찬란하게 핀 복사꽃 아침 비에 불타오르고 문 앞의 수양버들 푸르고 푸르러 저녁 안개에 잠겼네'라고 하였고 김양옥(金玉)은 '늙은 소나무며 푸른 회나무 즐비한 천지에 우뚝 솟은 물 위 누정 봉래섬 곁에 자리했네'라고 읊었다.

이와 같이 광한루원에는 연꽃, 대나무, 백일홍, 수양버들, 복숭아나무, 소나무와 함께 여러 가지 꽃들을 심고 가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광한루의 경계 밖 서남 측에는 율림(栗林)이 조성되어 있음을 『남원지(南原誌)』와 황수신(黃守身)의 《광한루기( 廣寒樓記)≫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1444년(세종 26) 당시 황무지였던 곳에 남원부사 유지례(柳之禮)가 유실수인 밤나무를 심어 숲이 된 것을 시원(始原)으로 하고 있으며 『해동잡록(海東雜錄)』2 본조 강희맹(姜希孟) 시문에서도 남원(南原) 광한루(廣寒樓) 남쪽에 밤 숲[栗林]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덕령(金德齡)1)이 의병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밤나무를 모두 베 버렸다고 전해오며 이후 이곳에 장이 들어서면서 이를 율장(栗場)이라 하였는데 이러한 내용은 과거 남원관부도(南原官府圖) 및 전라북도 각 군읍지에서도 표기되어 있다.

삼신산과 호수 주변에 심은 왕버들은 광한루원의 대표적인 수종으로 1582년 선조 재위 15년경 전라관찰사 정철 과장의국 부사가 호수를 조성하고 오작교를 축조할 때 심었다고 전해진다. 가장 오래된 왕버들 나무의 수고는 약 22m, 흉고둘레 6.6m, 수관폭은 25m로 줄기에서 오랜 세월의 굴곡을 느낄 수 있다.

또 광한루원 정문인 청허부를 들어서면 우측으로 노거수 팽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 팽나무는 1558년(명종 13)경 에 심었다고 하는데 옛 남산관 앞 있던 정원수로 알려져 있다.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이 팽나무의 수고는 18m이며, 흉고둘레 3.7m, 수관폭이 약 20m로 광한루원에서 가장 오래된 노거수 중 하나로 꼽힌다.

광한루원은 도교의 이상향과 음양사상이 결합된 요체로 조선시대 유행했던 연못을 네모지게 만들고 가운데 둥근 섬을 조성하여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 (天圓地方)의 자연관을 담고 여기에 수목과 어우러져 은 하를 상징하는 호수에 투영되는 수목들은 계절에 따라 색색의 옷으로 갈아입어 또 다른 풍관을 연출하는데 이는 오직 광한루원에서 만 보고 느낄 수 있는 원림의 가치이다.

1) 김덕령(金德齡) :
1567-1596)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자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광산. 자는 경수(景樹).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과 함께 3천명의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高敬命)의 수하로 들어갔다.
이듬해 어머니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 장성현감 이귀(李貴) 등의 권유로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그 세력을 크게 떨쳤다.

출처 : 김주완, 『하늘과 달, 그리고 사랑담긴 정원 남원광한루원』37p. (남원문화원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