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루 남쪽에 걸려있는 현판은 본래 남원부사를 지낸 신 감(申)의 조카인 신익성(聖)이 쓴 글씨이다.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본 관은 평산(平山)이며 자는 군석(君奭), 호는 낙전당(樂全 堂)·동회거사(東淮居士), 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신흠( 申欽)이다.
신익성은 선조의 딸 정숙옹주(貞淑翁主)와 혼인하여 동 양위(東陽)에 봉해졌고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역임했다. 병자호란 때 신익전(申翊全)·허계(許啓)·이명한(李明漢)· 이경여(李敬輿)와 함께 청과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한 척화오신(斥和五臣)의 한사람으로 문장과 시·서에 뛰 어나 선원(김상용(金尙容)과 더불어 전서의 대가였다.
그의 글씨로는 회양의 「청허당 휴정대사비(淸虛堂休 靜大師碑)」, 광주(州)의 「영창대군의 비(永昌大君碑)」, 파주의 「율곡 이이비(栗谷李珥碑)」 등이 있다.
월랑과 본루 사이에 ‘廣寒樓(광한루)’ 현판은 중국 서법 가로 알려진 항내등(項乃登)의 글씨이다. 현판에 '癸酉孟冬中國 項乃登(계유 맹동 중국 항내등)'이라고 쓰여 있어 광한루 보수가 끝난 이듬해인 1933년에 현판한 것으로 항내등의 글씨를 현판하게 된 내용은 전해오지 않는다.
항내등(項乃登)은 중국 절강성 출신으로 청나라말에 활동했던 서법가이며 명나라 때 양의공(襄毅公)의 후손이다. 자는 약암(岩), 호는 금장(琴)이며 가선대부를 지냈고 선통 원년(1909)에 저장성 국자감에 헌납된 선공시험에 1위를 차지하였다. 중화민국 성립 후 상해교통은행 본점 고위비서를 역임하고 만년에 베이징에 정착하여 자 호를 식원노인(息園老人)으로 삼고 『식원영물주음(息園呤物珠吟)』과 시집 『수취록기문을 남겼다.
북쪽 후면에 ‘湖南第一樓(호남제일루)'는 '호남에서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누각"이란 뜻으로 1855년 남원부사 이상억이 누각을 중수하면서 손수 써 걸었으나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없어진 것을 2-4대 국회의원을 지낸 조정훈(趙定勳)이 1935년에 다시 써서 걸었다.
조정훈(趙定勳 : 1914-1987)의 본관은 옥천(沃川)이며 호는 학산(鶴山)이다. 남원에서 태어나 경성부 사립 중동 학교(현 중동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8·15 광복 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남원군 지부장, 대동청년단 남원군 단장을 지냈으며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동청년단 후보로 전라북도 남원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조선민족청년단 이정기(李器)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전라북도 남원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는 서예에 조예가 깊고 글씨가 뛰어나 금암봉의 금수정(錦水亭) 현판과 옛 용성관(龍城館) 현판도 그의 글씨이다. 본루 내부에 '桂觀(계관)'이라 쓴 현판은 본래 신익성이 써서 걸었으나 동학농민운동 때 없어졌고 1930년 광한루를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난 뒤 1931년에 항농(巷農) 강대 형이 다시 써서 걸었다.
계관의 계수나무 계(桂)자는 달나라를 상징하는 계수나무를 의미하며 볼 관(觀)자는 달나라 궁전에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계관은 옥황상제가 살았다는 달나라를 뜻하는 월궁(月宮)과 같은 의미이다.
강대형(姜大炯:1871-1950)의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호는 항농(農)이다. 남원에서 태어나 문학과 글씨에 뛰어났고 특히 1930년 광한루를 대대적으로 보수할 때 기로회(耆老會) 소속의 노계소(老契所)에서 활동했던 양경수(梁慶洙), 이하덕(李河德)과 함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출처 : 김주완, 『하늘과 달, 그리고 사랑담긴 정원 남원광한루원』84p. (남원문화원 발행)